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다 가이치 (문단 편집) === 해방 이후 === 해방 이후에는 [[소련군]]이 [[한반도]]로 남하하면서 [[원산]]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의 집을 약탈하고 [[히키아게샤]]들을 강간하면서 일본인들이 교회로 대피하자 소다가 교회 입구에 나서서 이들을 보호했다. 1947년 10월 일본인들과 [[서울]]로 내려온 소다 부부는 일본으로 귀환하지 않고 [[미군정]]으로부터 [[조선]] 영주권을 취득했는데 얼마 안 있어 소다는 아내 우에노 다키에게 보육원을 맡기고 [[일본]]으로 건너가 폐허가 된 [[히로시마]]와 [[규슈]], [[홋카이도]]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 손에는 [[성경]], 다른 한 손에는 세계 평화 어깨띠를 두르고 [[일본의 전쟁범죄]]를 회개하고 사과할 것을 촉구하며 가는 곳곳마다 일본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다.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던 와중에도 도둑을 만나고 [[폐렴]]에 걸려 고생했으며 [[교통사고]]를 당해 죽을 뻔하는 등 생사를 오갔다. 그러던 중 다키 여사는 1950년에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당시는 한일간의 국교가 맺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했다. 1961년에는 사회인사가 된 고아원 동문들의 도움과 [[한경직]] 목사의 초청으로 특별기편을 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[[윤태일]] [[서울특별시장]]으로부터 [[서울특별시]] 시민증[* 1968년 [[주민등록증]]이 발급되기 전에는 각 지자체 도민증과 시민증이 [[신분증]] 역할을 했다. 서울시 시민이 되었다는 점에서 [[한국인]]으로 인정받은 셈이다.]을 받았고, [[국가재건최고회의]]로부터 일본인 최초로 문화훈장[* 현재 [[국민훈장]] 동백장으로 승계됨. 상훈기록상 성명은 소다 가이귀.]을 받았다.[* 비슷한 사회활동을 했던 [[윤학자|다우치 치즈코]]는 [[1963년]] 수여되었다..]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돌아온 소다 가이치.jpg|width=100%]]}}} || || {{{-1 {{{#fff '''△''' 1961년 한국으로 돌아와 환영을 받는 모습}}}}}} || [[1962년]] [[3월 28일]] 가마쿠라 보육원의 후신인 영락보린원[* 한경직 목사가 원장을 물려받으면서 영락보린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.]에서 고아들을 돌보며 생활하다가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1950년 1월에 세상을 떠나 국회의사당[* 현 [[서울특별시의회 본관]].]에서 [[이윤영]] 前 [[보건복지부장관|사회부장관]]을 장례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던 우에노 다키 여사와[* 해방 뒤 불과 5년 후인데 일본인의 장례가 이렇게 치루어진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만큼 다키 여사의 공덕을 인정한 것이다.] [[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]]에 합장되었다. [[국가재건최고회의]]는 당시 의장이었던 [[박정희]] 명의로 근조 화환을 보내면서 고인의 공적을 기렸다. 소다 부부는 양화진에 안장된 단 둘뿐인 일본인이기도 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